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쿠자와 유키치 (문단 편집) == 평가 == 일본인들은 대체로 계몽가, 일본 근대사의 위인 등으로 좋게 평가하며 일본 내에서 존경받을 위인 같은 주제로 조사 통계를 내면 항상 상위권 내에 든다.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[[일본 엔]] 중 최고액권인 만엔 권의 도안 인물이기도 하다.[* 2024년부터는 [[시부사와 에이이치]]로 교체된다.] 허나 [[한국]]이나 [[중국]]에서는 아무래도 제국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더 드러나기 마련이기에 부정적인 평이 많다. 다만 [[김옥균]] 등 급진개화파들은 개화에 기여하는 인물로 부분적인 평가를 했다. 후쿠자와 유키치는 과거 [[일본]] 정치, 사회의 여러가지 면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, 지금까지 일본에는 "정부의 역사"는 있어도 "국민의 역사"는 없었다고 까내린 적도 있다. 근대에 들어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[[정권]]이 [[민중]]에 의해 바뀌거나 민중의 요구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걸 보면서 한 말이다. 스스로 참여해서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준수하는 구미인들과 정부의 필요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정부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일본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인들을 비교하며 깐 것이다. [[자유주의]]자적 모습을 여기서 볼 수 있다. 물론 그는 언행불일치를 자주 보여주었다. 당대 제국주의가 하나의 사상적 조류이기는 했지만, 당대에도 제국주의를 비판한 사람들은 있었고, 현대에는 일본에서 종종 주장되는 '방어적 제국주의론'[* '일본이 제국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살려면, 혹은 안보를 지키려면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권 안에 두는 게 필요하다' 정도의 논리였다. 후쿠자와 유키치가 살아있을 시절에도 일본 내에서 거론되던 주장이었다.]과 겹치기 좋기 때문에 한국이나 중국 등에서는 당시 일본 사정을 이해한다 치더라도 마냥 긍정적으로 봐주기 어렵긴 하다. 그는 근대주의자로서 전근대적 요소를 혐오했음에도 자국의 전쟁범죄나 성매매 등 요소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옹호하는 언행을 자주 보였다. 메이지 유신 이후, 30만 명의 여성들을 해외 각지에 성노예로 팔아넘기는 [[가라유키상]]이 1920년까지 계속 이어졌는데 후쿠자와는 이에 대해서는 비판은 커녕 오히려 "매춘부의 해외 진출은 결코 비난해서는 안 되며, 자유롭게 하는 것이 경세상 필요하다(1896년 1월 18일)."라고 장려했다. 전 나고야 대학 교수인 야스카와 주노스케 역시 기존에 일본에서 이뤄진 후쿠자와 연구에서 벗어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다. 한국에도 '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 사상을 묻는다'라는 제목으로 [[http://news.naver.com/main/read.nhn?mode=LSD&mid=sec&sid1=102&oid=002&aid=0001972255|번역]]되어 나왔다. 그의 아시아 멸시 발언 어록도[* 이 발언들은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에서 발췌한 것들이다.] 부록으로 들어가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한번 읽어보자. 그 외 2015년 7월자로 야스카와 주노스케의 『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'후쿠자와 유키치'라는 신화』도 번역되어 있다. 여기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'흑화' 혹은 '전향'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국주의적인 인물이었으며, 이러한 면모가 감춰지는데 [[마루야마 마사오(1914)|마루야마 마사오]]가 깊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